니이체 숲속 외4편 / 박인옥
니이체 숲속 외4편
박 인 옥
그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다
겨우 아는 한글 몇 자로 읽어보려 애 쓰던 책들
그 중에 니이체 全集이 있었다
작은 눈을 껌뻑이다가 全자가 숲자와 비슷해서
나는 니이체 숲속이라고 읽었다
그림 한 점 없는 그 숲에서
듬성듬성 나있는 한자는 풀 같고 나무 같았다
니이체 全集이라는 금박의 글자를
니이체 숲속이라고 읽던 내 마음의 푸나무들
나이가 들어 나는 니이체의 책장을 열고
그의 생각을 닮은 큰 나무의 넓은 잎새를 들여다본다
중심을 향해 모이고
중심에서 퍼져 나가는 모세의 잎맥 하나가
숲과 이어지듯 생각은 길이 된다
쓰라린 날들의 진액이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수액처럼 천천히 흘러내린다
어려움을 견뎌내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고난의 한 가운데에 심은 잠언 한 그루는
나의 숲에서도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목마르게 내 자신을 쫒다 보면
나는 어느 새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다
올려다보면 황금색 털 덮힌 열매들이
금세라도 떨어질 듯 잎새를 잡아당긴다
광화문 광장에서
칼 한 자루 든 충무공 동상 아래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자식을 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던
천막 속에서 굶기만 하는 만신창이들
그 마음 달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흰 천막 몇 개는 명령을 기다리는 명량해전의 패잔선 같다
수많은 적선이 진을 친 울돌목
한 목숨 더 구하기 위해
배 벽을 높이고 물에 적신 솜이불로 총알을 막아냈지만
어린 목숨들의 죽음에 이제 그는
광장의 찬 바닥에서 잠드는 이들의 울음만 내려다 본다
거센 물결치는 광화문에서
천막의 함포가 쏘아대는 노란 리본들
찢어져 너덜거리는 신문고와
산자들의 상처를 파고드는 악성루머
대형 간판만 펄럭이는 언론사와
일대 골목마다 탄알처럼 장전된 어린 경찰들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만이
명량의 회오리 물살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구름
시아버지의 평생 지병은
지독한 난치성 향수병이었다
북녘 고향을 그리다 늘어난 목이 늘 덜렁거렸다
긴 목을 가누느라 틈만 나면
펼쳤던 기개를 접고 집 안을 겅중거렸다
재가 된 빈 몸은 봉인되어
한 칸 납골묘의 어둠 속에서 말라갔다
상달의 바람 부는 날
유골을 모시고 산에 가 공중에 뿌린다
바람 사이로 흩날리는 뼛가루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 같다
나목의 가지에도 한 점 묻더니
다시 휘익 날아가 바람의 날개 위에 얹힌다
흰 담배 연기 속 뿌연 뒷모습이 아득하다
좋은 곳으로 가셔요 평양 집에도 가 보시구요
잠시 부슬비가 내리더니 그치고
먹구름 찢고 나온 햇빛이 눈부시다
하늘 문이 열린 거지요?
십년이 며칠처럼 지나듯 백년도 그렇게 지나가겠지요?
천년의 이후이고 천년의 이전* 인 지금
아버님
또 어느 구름으로 피어나
무심한 바람 곁을 스쳐 지날까
* 고은 <순간의 꽃> 중에서
날개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아마츄어 고고학자
사우투올라의 어린 딸이 발견했다
비좁은 굴에서 무심코 본 벽화에는
석기 시대의 붉은 들소 수 십 마리가 거세게 뛰고 있다
내 가슴에 얼굴 부비며 어디든 따라 다니는
막내딸은 날아다니는 새를 보다가
나는 왜 날개가 없느냐며 큰 소리로 울곤 했다
그 때마다 너는 날마다 내 마음 속을 날아다닌다고
나의 컴컴한 동굴 속 어디쯤에서
수 만 마리 새들과 날고 있다고 달랬다.
불빛을 비추면 어느 원시의 벽화 속 새들이 나타나고
거짓말처럼 너는 나의
한 마리 어여쁜 새라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린 새의 연한 주둥이 같이 따닥따닥
종알거리는 너를 보면
숨겨 왔던 내 날개가 자꾸 푸드덕 거린다
* 알타미라 - 스페인의 세계문화유산
쭉정이
마른 팥 한 되
맹물 속에서 쭉정이를 띄운다
스텐리스 식기에 촤르르
천둥소리 내며 쏟아지던
밀실이 된 군데군데서
속 빈 채 숨어 있던 쭉정이들이
물에 쓸려 내려간다
명동 거리, 골목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 됫박 팥알 같은 사람들 속에서
얇은 기도문 한 장에 사탕 한 알 붙여
예수를 나눠주는 이들이 보인다
한 손에 든 커다란 십자가는
천국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 같다
무한하리라는 축복에 기대던 나도
저 한 됫박 팥알 속에 숨어
맹물 속에서 둥둥 뜨는 믿음이 아닐까
또다시 십자가 위의 그를
수없이 못 박아 대는
쭉정이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