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탐사 / 박기동
동굴 탐사 / 박기동
어떤 상처는
살 속 깊이 흉터를 만든다
또 어떤 흉터는 돌에 박힌 그림처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어두운 화랑의 통로를 지나
암벽을 더듬는 내시경은 벽화 앞에 멈춘다
화가가 동굴을 지나간 뒤
알타미라는 천만년을 보내고도 살아있었다
붓은 칼보다 깊다더니
통증은 도려내도 되살아났던 것이다
자라난 들소의 뿔이 칼자국을 불렀듯
쥐뿔같은 사랑도 상처로 남은,
내 속을 지나간 사람 하나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시도 때도 없이 재발하는 불후의 그림 하나 얻었다
돌아와 다시
쓰린 공복을 지나 긴 잠복을 지나
모니터에 재연되는 한 폭의 후유증으로 돌아와
천만년 전의 상처를 들추는 오후 네시경
- 수주문학상 중에서
까치 조문객 외 4편 / 이상규
까치 조문객 외 4편
이상규
웃음소리가 어울리는
초등학교 담장 밑에
어느 날 초상이 났다
아직 애송이인
애송이 까치가 죽었던 것이다
검은 그늘 차양 속에
조문객은 꾸역꾸역 모여 드는데
상주는 없다
울어줄 수 없는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측백나무 푸른 집 위에서
얼굴을 묻고
조문 받는 어미 상주
주위에
심란하던 매미 소리도 죽고
꺽꺽
목 메인 곡소리만
벽에 부딪쳐 튕겨져 나온다
귀 따갑게
울어도
울어도
시끄럽지 않다
어미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지
초대 받지 않은
조문객이 올 때마다
깍깍
성긴 울음보 터트린다
백목련
담장 밖
갓 피어난 목련꽃을 만났다
너무 청아해 어루만져 보고 아끼며 보다가
예고 없이 나타난
거친 바람에 아쉽게 헤어졌다
그후
목련나무 볼 때마다
하이얀 꽃망울 맺는다
왔다 간 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피고 지기를 수십 번
계절에 상관없이
피어나는 목련
보고 싶고
그리울 때
언제나 반가운 듯 환하게 나타난다
진하디진한 분 내음 풍기지 않지만
꽃 지면 더 자주 피어난다
만나지 않아도 볼 수 있어
슬쩍 목 빼고
담 넘어 목련을 훔쳐본다
산낙지의 힘
물동이에 낙지가
빨판 박아 떨어지지 않는다
붙어야 산다는 무식쟁이
뻔질뻔질 대가리 잡아보니
먹물 대포를 쏘아댄다
최후를 아는 건지
발발발 부들부들
인정사정없이
토막토막을 내면서 보니
끈적끈적 하얀 피다
고요한 순교라는 듯
신성한 몸짓이다
천둥과 꽃비는 없어도
벌떡 일어나는
힘의 기적은 일어났다
보호수
큰 나무가 잉잉거린다
도심 속 망루 같은 집에 둘러싸여
햇빛과의 관계도 끊어져
그늘 접었다 펴는 일조차 할 수 없네
죄인 같은 노목
사방이 쇠창살로 에워싸여
매미와 다람쥐 같던
철부지 친구들 인적 끊기고
세월에 찌들어
점점 말라가는 가지조차도 무거운 듯
희끗희끗 이파리
하늘거리다 한잎 두잎 빠져 버리네
매연 냄새 익숙하지 않은
눈에 익은 새가
오랜만에 다가왔다가
소리 없이 날아간다
냉랭한 바람도 싫어할 줄 모르고
참을 줄만 아는 늙은 나무
살았어도 죽은 듯
울타리에 갇혀 눈치만 보네
밤에 우는 새
으슬으슬 산마루
어둠을 안고 홀로 우는 새
그 소리만 들어도
힘없는 어미새 소리네
밤에만 우네
가슴에 묻어둔 사연이 있어
흐느끼는 소리인 듯
떨면서 우네
집을 버린 새끼를 애타게 기다리며
울먹울먹 처량한 소리인 듯
흐느끼며 우네
훨훨 날아가지 않는 한이 있어
가슴 아픈 소리인 듯
여명이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
쓰읍쓸 홀로 우는 새
그 소리만 들어도
어렴풋 그 모습 그려지네
-2016 <한국문예원> 신인상 추천작
【신인추천평】 · 강희안
이상규의 시는 적실한 체험에서 육화된 듯한 언어와 의식이 섬세하고도 싱그러운 무늬결을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경우 체험과 상상력이 얼마만큼의 미학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몸소 체득한 듯하다.
「까치 조문객」의 경우 문명 비판적 차원에서 재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소외되고 해체되는 도시 변두리 철거민들의 삶을 그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 실존의 문제로까지 나아갔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강점이었다. 더구나 비극적인 철거민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까치로 은유화하는 기량은 가히 볼 만했다. 짐짓 체험만을 묘사하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도발적인 시적 메타포를 끌어내면서 심도 있는 존재론적 인간의 세계로 변용해내는 기량을 높이 산 것이다.
「백목련」이란 시는 무기교의 기교라 불릴 만한 담백한 의식을 높이 샀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배후에는 단독자로서 겪는 익명적 존재의 비극이 자리한다. 그의 시편에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대상과 자아와의 상호삼투하는 능력을 중시하는 미덕이 중시된다. 「밤에 우는 새」라는 시에서는 체험의 무게를 자신만의 생동감 있는 언어 감각을 매개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적 공간을 확보하면서 밤의 풍경으로부터 삶의 고통과 어두운 현실의 실체를 의인화해내는 사물 인식의 태도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어 독자를 흡인하는 마성을 발휘한다.
「보호수」란 시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비판적 의식이 짙게 표백되어 있어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 흔히 선가에서 이르는 고해의 세계를 깊이 있게 정관하고 있어 독자의 눈길을 잡는다. 「밤에 우는 새」에는 무엇보다도 시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묘사 기법을 통해 한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에 얽힌 비극의 내력을 무리 없이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호감이 갔다. 한 개인의 실존이 우리 시대의 환부를 밀어내려는 안간힘과 맞딱뜨리는 시적 공간을 구축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장점을 지닌 이상규의 시에는 한편 한편 이미지의 완결력과 중간중간 툭툭 튀어나오는 잠언적인 경구도 읽을 만하다는 점에서 신인 추전에 넣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의 건투는 빌면서 좀더 깊이 있는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전한다.
니이체 숲속 외4편 / 박인옥
니이체 숲속 외4편
박 인 옥
그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다
겨우 아는 한글 몇 자로 읽어보려 애 쓰던 책들
그 중에 니이체 全集이 있었다
작은 눈을 껌뻑이다가 全자가 숲자와 비슷해서
나는 니이체 숲속이라고 읽었다
그림 한 점 없는 그 숲에서
듬성듬성 나있는 한자는 풀 같고 나무 같았다
니이체 全集이라는 금박의 글자를
니이체 숲속이라고 읽던 내 마음의 푸나무들
나이가 들어 나는 니이체의 책장을 열고
그의 생각을 닮은 큰 나무의 넓은 잎새를 들여다본다
중심을 향해 모이고
중심에서 퍼져 나가는 모세의 잎맥 하나가
숲과 이어지듯 생각은 길이 된다
쓰라린 날들의 진액이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수액처럼 천천히 흘러내린다
어려움을 견뎌내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고난의 한 가운데에 심은 잠언 한 그루는
나의 숲에서도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목마르게 내 자신을 쫒다 보면
나는 어느 새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다
올려다보면 황금색 털 덮힌 열매들이
금세라도 떨어질 듯 잎새를 잡아당긴다
광화문 광장에서
칼 한 자루 든 충무공 동상 아래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자식을 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던
천막 속에서 굶기만 하는 만신창이들
그 마음 달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
흰 천막 몇 개는 명령을 기다리는 명량해전의 패잔선 같다
수많은 적선이 진을 친 울돌목
한 목숨 더 구하기 위해
배 벽을 높이고 물에 적신 솜이불로 총알을 막아냈지만
어린 목숨들의 죽음에 이제 그는
광장의 찬 바닥에서 잠드는 이들의 울음만 내려다 본다
거센 물결치는 광화문에서
천막의 함포가 쏘아대는 노란 리본들
찢어져 너덜거리는 신문고와
산자들의 상처를 파고드는 악성루머
대형 간판만 펄럭이는 언론사와
일대 골목마다 탄알처럼 장전된 어린 경찰들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만이
명량의 회오리 물살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구름
시아버지의 평생 지병은
지독한 난치성 향수병이었다
북녘 고향을 그리다 늘어난 목이 늘 덜렁거렸다
긴 목을 가누느라 틈만 나면
펼쳤던 기개를 접고 집 안을 겅중거렸다
재가 된 빈 몸은 봉인되어
한 칸 납골묘의 어둠 속에서 말라갔다
상달의 바람 부는 날
유골을 모시고 산에 가 공중에 뿌린다
바람 사이로 흩날리는 뼛가루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 같다
나목의 가지에도 한 점 묻더니
다시 휘익 날아가 바람의 날개 위에 얹힌다
흰 담배 연기 속 뿌연 뒷모습이 아득하다
좋은 곳으로 가셔요 평양 집에도 가 보시구요
잠시 부슬비가 내리더니 그치고
먹구름 찢고 나온 햇빛이 눈부시다
하늘 문이 열린 거지요?
십년이 며칠처럼 지나듯 백년도 그렇게 지나가겠지요?
천년의 이후이고 천년의 이전* 인 지금
아버님
또 어느 구름으로 피어나
무심한 바람 곁을 스쳐 지날까
* 고은 <순간의 꽃> 중에서
날개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아마츄어 고고학자
사우투올라의 어린 딸이 발견했다
비좁은 굴에서 무심코 본 벽화에는
석기 시대의 붉은 들소 수 십 마리가 거세게 뛰고 있다
내 가슴에 얼굴 부비며 어디든 따라 다니는
막내딸은 날아다니는 새를 보다가
나는 왜 날개가 없느냐며 큰 소리로 울곤 했다
그 때마다 너는 날마다 내 마음 속을 날아다닌다고
나의 컴컴한 동굴 속 어디쯤에서
수 만 마리 새들과 날고 있다고 달랬다.
불빛을 비추면 어느 원시의 벽화 속 새들이 나타나고
거짓말처럼 너는 나의
한 마리 어여쁜 새라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어린 새의 연한 주둥이 같이 따닥따닥
종알거리는 너를 보면
숨겨 왔던 내 날개가 자꾸 푸드덕 거린다
* 알타미라 - 스페인의 세계문화유산
쭉정이
마른 팥 한 되
맹물 속에서 쭉정이를 띄운다
스텐리스 식기에 촤르르
천둥소리 내며 쏟아지던
밀실이 된 군데군데서
속 빈 채 숨어 있던 쭉정이들이
물에 쓸려 내려간다
명동 거리, 골목골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 됫박 팥알 같은 사람들 속에서
얇은 기도문 한 장에 사탕 한 알 붙여
예수를 나눠주는 이들이 보인다
한 손에 든 커다란 십자가는
천국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 같다
무한하리라는 축복에 기대던 나도
저 한 됫박 팥알 속에 숨어
맹물 속에서 둥둥 뜨는 믿음이 아닐까
또다시 십자가 위의 그를
수없이 못 박아 대는
쭉정이는 아닐까